성급하지 않다. 서두른다고 기회가 눈앞에 나타날 리 없고, 하룻밤 사이에 ‘신뢰’라는 마음속 만리장성이 쌓일 리 없다. 변화하는 시장 속에서 끊임없이 배우고 준비하며 내실을 다지다가 어느 순간 포착된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 옷깃을 스친 누구라도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것. 20여 년 베테랑 NH벤처투자 김현진 대표가 전하는 VC의 자세다. NH벤처투자가 보여주는 최근의 행보에도 이런 철학이 담겨있다. 최근 이스라엘과의 펀드 운영을 비롯한 글로벌 협력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는 김현진 대표를 만나보자.
Q. NH벤처투자와 대표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NH벤처투자는 2019년 11월에 NH금융지주의 아홉 번째 계열사로 설립된 신기술금융사로, 현재 10개의 투자조합을 통해 3,610억 원의 AUM(운용 자산)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연세대학교 세라믹공학과와 카이스트 무기재료공학과를 졸업하고 삼성그룹에서 연구 엔지니어로 근무했습니다. 이후 2000년에 벤처캐피탈 업계에 입문해 무한기술투자, 인터베스트, SBI인베스트먼트, 코오롱인베스트먼트를 거쳤으며, 2023년부터 NH벤처투자의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Q. NH벤처투자가 지향하는 가치와 투자 방향을 설명해주세요.
NH벤처투자는 NH금융지주의 100% 자회사이지만 특정 분야에 집중하는 CVC는 아닙니다. 벤처캐피탈의 핵심 역할은 ‘LP의 출자금을 기반으로 투명하게 운용해 수익을 창출하고 분배하는 것’이기에, NH벤처투자는 유망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성장을 지원하여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동시에, LP분들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정통 벤처투자를 지향합니다.
이와 함께 NH농협금융그룹 계열사로서의 역할도 반영하고자 합니다. 농협은 협동조합이기에 구성원이 협력해 사업을 진행한 뒤 그 수익을 배분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요. 투자한 기업에 대해 범농협 연계를 통한 협력과 시너지 창출로, 투자자와 투자 기업, NH벤처투자 모두가 좋은 결과를 공유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Q. 타 은행 계열 벤처캐피탈과 차별화되는 포인트, 성장 전략을 말씀해주세요.
앞서 자리 잡은 은행 계열 벤처캐피탈들을 보며 많은 것을 배우고 있고, NH벤처투자 역시 빠르게 성장해 저희만의 색깔을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다만 저는 외형적인 성장만큼이나 내부를 탄탄하게 다지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명확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방향으로 꾸준히 나아가는 ‘우보천리’의 정신으로 안정적인 성장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농협 계열사라는 아이덴티티에 따라서 ‘농식품과 바이오 벤처 분야에 일정 부분 이상 투자한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Q. 이스라엘 OurCrowd와 1,000억 원 규모의 ‘NH-OC 글로벌 펀드’를 결성하셨는데요. 이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이스라엘은 한국과 유사한 스타트업 강국이며 한국 기업의 성장을 눈여겨보면서 한국 진출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2022년 말 저와 개인적으로 연결된 것을 계기로, NH벤처투자 대표에 취임한 후 양국 스타트업 비즈니스 협력을 모색하게 됐는데요. 마침 성장금융에서 글로벌 오픈이노베이션 펀드라는 좋은 기회를 주셔서 본격적인 협력을 시작했습니다. 최근 이스라엘의 외부 이슈로 어려움이 있었으나 벤처산업에 대한 지원은 여전히 아낌없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좋은 투자 기회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벤처 비즈니스 문화로 인해 규약 협의를 비롯한 투자 프로세스, 투자 대상 등을 조율하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 신뢰가 두터워져서 현재 첫 투자 딜을 검토 중입니다. 이 딜에 대해 저희 펀드에 LP로 참여한 실리콘밸리의 캐피탈사들과도 협력해 글로벌화, 특히 미국 시장 진입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할 계획입니다.
Q. 20년간 다양한 투자 활동을 이어온 전문가로서, 눈여겨보고 있으시는 섹터가 있다면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투자 대상이 되는 산업도, 사회 환경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지금 NH벤처투자와 제가 중점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는 AI, 기후변화, 인구 구조 변화 등입니다. 국내 기업의 경우 AI 애플리케이션 분야를 주목하고 있으며, 기후 관련해서는 탄소 저감, 특히 애그테크(AgTech) 분야에 많은 검토를 진행 중입니다. 또한, 인구 구조 변화로 가속화되는 고령화 시대를 대비해 로봇과 실버산업도 주의 깊게 보고 있습니다.
Q. 개인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인생 딜’은 무엇이며, VC로 일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모든 딜이 제게는 ‘인생 딜’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아이씨디(ICD)가 기억에 남습니다. 디스플레이 산업의 핵심인 드라이에처를 일본에서 대부분 수입하던 당시, 이 회사는 임대 공장에서 플라즈마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 중이었는데요. 처음 방문했을 때 무진복을 쓰고 들어가 플라즈마를 뜨는 걸 보면서 ‘이 회사는 될 수 있겠다’고 판단해 투자했고 꽤 오랜 시간을 같이 했습니다. 중간에 산업의 변화로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대표님을 포함한 임직원들의 많은 희생도 있었지만, 결국 코스닥에 상장해서 좋은 성과를 냈는데요. 기술만 좋다고 되는 게 아니라 시장의 트렌드와도 맞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심 기술을 가진 회사들은 버텨서 성공한다, 그럴 때 VC는 어떻게 지원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중요한 딜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회사에 대해서는 애정을 갖고, 당시 함께 했던 분들과 연락하며 지냅니다.
Q. 대표님의 투자 원칙, 투자 철학을 말씀해주세요.
‘모든 투자는 서로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협상 과정에서 게임 이론에 따라 서로 가장 유리한 점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성사 여부를 떠나 그동안 만났던 회사들에게 제가 ‘신뢰할 만한 투자자였다’는 사실을 각인시키도록 노력합니다. 또한, 스타트업의 부문만 놓고 봤을 때,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은 벤처캐피탈이 아니라 스타트업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런 투게더’의 마음으로 회사 성장을 위해서 같이 손잡고 나아가는 가장 진실한 동반자가 되고자 합니다.
Q. 좋은 딜을 발굴하는 법, 시장 흐름을 읽을 때 참고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20년 넘게 투자하며 깨달은 건 ‘마법의 구슬처럼 좋은 딜을 단번에 발굴할 방법은 없다’는 점입니다. 발품을 통해 부지런히 사람을 만나고 그 시장에서 가장 많은 기술을 가진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변화하는 기술과 산업에 대해 알아가는 게 가장 중요하죠. 구글 검색이나 유튜브 등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저는 현업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가장 좋은 정보를 빠르게 얻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것을 인지할 수 있는 자리에 계신 분들과 자주 만나 의견을 듣고, 제가 알고 있는 것과 합쳐서 시장의 흐름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며 판단하고자 노력합니다.
Q. VC인들을 위한 교육에도 힘써주고 계신데요. 이들을 위해 조언 말씀 부탁드립니다.
벤처캐피탈리스트가 잘 성장하고 계속해서 시장을 따라가며 좋은 딜을 발굴하려면 ‘호기심’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모든 걸 신기해하고 궁금해하면서 지식과 경험을 쌓는 것처럼 VC도 안주하지 않고 일상과 주변은 물론, 투자를 위해 전문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분야의 변화에 대해 끊임없이 호기심을 갖는 게 중요합니다. 얼리어답터로서 직접 뭔가를 만져보고 사용해보려는 노력도 필요하고요.
VC 주니어분들께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긴 호흡’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와 산업, 기술의 변동이 빨라지면서 호흡도 짧아지고 있는데, VC는 긴 호흡으로 회사를 지원하고 회사가 성장할 수 있도록 지켜봐줘야 합니다. 시장이 언제 올 것인가, 그 회사가 시장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까 꾸준히 기다려주는 인내가 매우 중요합니다.
Q. 대표님이 생각하시는 VC의 매력은 무엇이며, 어떤 VC로 기억되길 원하시나요?
제가 만나는 대표님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해당 분야에서 저보다 더 많은 경험과 애정을 가진 분들입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내가 더 공부해야겠구나’라는 긍정적인 자극을 받는 덕에, 이 직업이 참 좋다고 느낍니다. 또한, VC로 활동하며 얼리어답터로서 새로운 것을 먼저 접할 기회가 많아 아이들과의 대화도 풍부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떤 VC로 기억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저와 만났던 투자기업의 대표님들이 ‘믿고 함께 갈 만한 VC였어’라고 기억해주시길 바라고, 후배들은 ‘늘 새로움을 추구하며 그 경험을 고스란히 같이 나눠줬던 선배’로 기억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Q. 마무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카이로스라는 신이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크로노스와는 다른 의미의 시간을 만지는 신인데요. 앞머리는 긴데 뒤는 대머리고, 등에 많은 날개가 달려 있으며 양손에 저울과 칼을 들고 있습니다. 그걸 풀이해보면 ‘사람들이 그를 금방 알아보고 앞머리를 잡을 수 있게 하되, 잡기 전에는 저울과 칼로 냉정하게 판단하고 냉철하게 결정해야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버리면 뒷부분은 대머리라서 잡기 어렵고, 날개가 있으니 금방 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카이로스는 ‘기회의 신’이거든요.
VC로 일하면서 저도 여러 기회를 만났고, 그런 기회를 찾고 있는 분들과 많은 협의를 했습니다. 이미 준비가 돼 있었을 때는 ‘이게 기회구나’라고 알아챘지만 그렇지 않을 땐 지나고 나서야 깨닫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를 포함한 NH벤처투자의 모든 임직원들은 기회를 빨리 알아차리고 결정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과 공부를 해나가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앞으로도 좋은 스타트업과 좋은 인연을 만들 기회를 놓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